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에 백산 언덕에서 거리 공연을 시작한 20명의 예술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정교한 무대 디자인과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존의 서커스를 혁신하며 라스베이거스와 LA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공연으로 전 세계적인 열광을 일으켰고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 서커스 제작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런 태양의 서커스의 발전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 태양서커스의 창설과 대 순회공연
1984년, 르 클럽 데 탈롱 오는 라 페트 프랑과 연계되어 있는 퀘벡 여름축제에서 공연하였다. 그들은 라 페트 포랑으로 운영 능력을 인정받아 '캐나다 발견 450주년 기념' 조직 위원장인 쟈크 레나르로 부터 퀘벡 서커스의 발전을 위한 3만 달러의 기금을 받게 된다. 이에 기 랄리베르테는 기금 사용을 위한 프로젝트를 계획하며 임의로 태양서커스를 창설하게 되었다.
각 지방에 활기를 불러일으켜 주길 원하는 정부의 기대에 응해 태양서커스는 13주 동안 11개의 지방을 순회공연을 하며 길거리 공연가들을 모았다. 이 순회공연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이 보여준 새로운 형태의 서커스 공연은 관객들의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태양서커스의 정착과 성공의 원천이 되었다. 성공적인 첫 프로젝트가 끝난 후, 태양의 서커스는 1985년 국제 청년의 해를 위한 2년에 걸친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당시 퀘벡의 주지사였던 르네 레베스크는 주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동시에 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함으로 그들은 160만 달러의 기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태양서커스는 하나의 독자적인 서커스 단체로 거듭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 모색과 시도
태양서커스의 초기, 기 랄리베르테는 캐나다 국립 서커스학교장이자 세계 서커스계의 발전과 추세에 정통한 기 캬롱과 함께 새로운 서커스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세계 서커스들에 주목했으며, 때로는 협력하여 상호 발전을 도모해 나갔다. 기 캬롱은 태양서커스에 큰 영향을 미친 서커스단으로 가장 먼저 1982년 몬트리올을 방문한 릴리 핑이라는 여자 단장이 이끄는 중국의 서커스단을 꼽는다. 공연 동안 밴드가 연주하는 배경음악과 연기에 맞게 제작된 의상, 아름다운 안무가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공연의 힘은 기 랄리베르테와 기 캬롱으로 하여금 동물 없이 인체들의 공연만으로 이루어지는 서커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들은 모스크바 서커스의 스토리를 내포한 연기와 프랑스 국립서커스의 에너지, 독일 시르크 론칼리의 무대 전환법과 제4의 벽 파괴를 그들의 서커스에 접목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또한 태양서커스는 스위스의 시르크 니와 협력관계를 맺어 정보와 기술을 공유하고 나아가 1992년 스위스로 가서 시르크 니의 고전적인 동물 연기와 태양서커스를 조합한 합동공연을 했다. 1985년, 기 랄리베르트와 기 캬롱은 서커스의 혁신을 위해 연극을 전공한 프랑코 드라고네를 연출가로 영입하였다. 벨기에 출신인 프랑코 드라고네는 1982년부터 캐나다 국립 서커스학교에서 코메디아 델라 르테(commedia dell'arte)와 연기술에 관한 강의를 했다. 그는 서커스에 연극을 접목시키기를 원했고 이는 혁신을 원하는 태양서커스의 이념과 일치하였다.
3. 대중과 세계로의 도약
1985년은 태양서커스가 퀘벡 바깥으로 본격적으로 시장을 넓히기 시작한 첫 번째 해였다. 오타와, 토론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순회공연을 한 그들은 좋은 비평을 얻었으나, 홍보의 미흡으로 인 해 75만 달러의 적자라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는다. 당시, 그들은 나이아가 라 폭포 공연에서 무대 위의 인원보다 관객 수가 적으면 공연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세울 정도로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 참패는 파산으로 이어졌지만 기 랄리베르테는 1986년 예정되어 있던 밴쿠버 엑스포(Expo '86 in Vancouver)를 기약하고 파산에 따른 재정적인 정비에 들어갔으며, 의상 디자이너와 음악감독으로 미셀 크레트와 르네 뒤페레를 영입하여 시ㆍ청각적 예술성의 도약을 꾀하였다. 1986년의 《라 마지 콘티뉴(La Magie Continue)》51)는 맞춤 의상과, 공연을 위해 제작된 음악이 더해져서 예술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 공연이었다. 공연은 1987년부터 2년 동안 북미지역을 순회 공연하였다. 1987년 《르 시르크 레엥방테》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태양서커스에 차기 작에 대한 압박을 줄여 준 작품이었다. 이전부터 시도되었던 예술적 혁신은 계속되었다. 연극적인 접근을 위해 의상은 각 인물들의 캐릭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맞춰졌고, 음악은 공연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극의 흐름을 반영하게 제작되었다.
1987년의 로스앤젤레스 페스티벌(Los Angeles Festival)은 태양서커스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태양서커스는 재정난 으로 인해 로스앤젤레스까지 공연을 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 랄리베르테는 이를 기회로 판단하여 편도 예산만으로 로스앤젤레스 공연을 추진하였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기 랄리베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남아 돌아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든지. 그들의 공연은 수많은 명사들과 연예계 책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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